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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일기

C.S. 루이스, '개인기도' 요약 1

by 치자꽃 2023. 5. 26.

C.S. 루이스의 <개인기도>는 가상의 친구인 '말콤'에게 쓴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 책입니다. 총 22통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도에 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책 전반에 담고 있습니다. 이 포스팅에서는 편지 1~4까지 제가 읽고 공감이 되었던 부분들 위주로 요약을 해보았습니다.
 

 
1. 완벽한 교회 예배는 그 형식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예배, 그래서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께로 만 향하는 예배일 거야.
 
2. 세상을 이루는 데는 온갖 종류의 사람이 필요하다네. 교회도 마찬가지야. 교회의 경우에는 더 그럴지도 모르겠군. 은총이 자연을 완전하게 한다면 은총 덕분에 우리 모두의 본성이 확장되어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풍성한 다양성을 온전히 드러내게 될 걸세. 그리고 천국은 지옥보다 훨씬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겠지. 기성품 기도문이 내게 주는 유익은 첫째, 건전한 교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준다는 거야. 사람은 혼자 내버려 두면 '단번에 받은 그 믿음'에서 벗어나 '내 종교'라는 망상으로 쉽사리 빠져 들 수 있다네. 둘째, 기도문은 내게 '마땅히 기도할 바'를 되새기게 해 준다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는 특히 그런 것 같네. 가장 가까운 전봇대가 제일 커 보이듯, 현재 위기가 언제나 가장 커 보이는 법이지. 그것 때문에 더 크고 항구적이고 객관적이며 많은 경우 더 중요한 필요들이 밀려나 버릴 위험이 있다네. 끝으로, 기성품 기도문은 '의식의 요소'를 제공하네. 자네는 그것이야말로 불필요하다고 여기겠지만 나는 꼭 필요하다고 보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더 없는 근접성과 동시에 무한한 거리를 인식해야 하네. 격식을 갖춘 몇 편의 기성품 기도문은 나의 그런 '건방'을 바로 잡아 준다네.
 

 
3. 내 경우, 시간에 쪼들릴 때는 잠들기 직전까지 기다리기보단 부적당한 시간이나 장소에서라도 기도를 하는 쪽을 택한다네. 출장 가는 날이라면 차라리 혼잡한 기차 안에 앉아 있을 때 기도를 하지, 호텔 숙소에 도착하는 한 밤 중 까지 기도 시간을 미루지는 않겠네. 머리는 쑤시고 목은 따끔거리고 멍 하고 정신없는 상태일 텐데 무슨 기도가 되겠나. 다른 날, 좀 여유가 있을 때 공원 벤치에 앉거나 뒷골목을 거닐며 기도 할 수도 있겠지. 무릎을 꿇고 반쯤 잠든 채로 기도 하는 것보다는 정신을 집중하고 편하게 앉아 기도 하는 편이 훨씬 낫네.

 
 4. 통상적으로, 하나님께 알려 준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목적상 사물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네. 우리는 지렁이, 양배추, 성운처럼 신의 인지 대상이 되는 거야. 하지만 우리가 그 사실을 인식하고 우리의 의지를 총동원해 그 일에 동의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사물이 아니라 인격체로 대하게 되네. 우리가 베일을 벗은 거라고 말할 수 있지. 하나님이 꿰뚫어 보실 수 없는 어떤 베일이 있었다는 말은 아닐세. 변화는 우리 안에서 일어난 거야. 수동적 존재가 능동적 존재로 바뀐 거지. 가만히 있다가 알려지는 대신, 우리 스스로를 드러내며 보시라고 자신을 내 놓는 걸세. 
 
이렇게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인 자격을 가지고 산다는 생각은 업적과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우리에게 그런 자격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치고 있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는 주체가 바로 성령이시거든. 베일을 벗음으로써, 그리고 우리 죄를 고백하고 간구하는 바를 '아룀'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격체라는 높은 지위를 갖게 되네. 그리고 그분은 낮아지심으로 우리에게 인격체가 되시지. 사람이 어떤 하나님을 만나느냐는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어느 정도 달려 있기 때문이지. 하나님 안에서 열리는 문은 그 사람이 노크한 문이야.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그분 안에 있는 인격은 그 만남을 환영 할 수 있거나 적어도 직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신다네. 우리가 하나님을 '그것'이 아니라 '너'로 부를 때 그분도 우리를 '너'로 대하고 말씀하시지.
 

 
그러나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우리가 완전한 존재라면 어떻게 기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의 모습 그대로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일세. 기도를 '베일 벗기'로 보는 내 생각을 받아들였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을 걸 걸세. 실제로는 마음이 B에 대한 소원으로 가득차 있는데 허울뿐인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A를 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지. 우리는 우리 속에 있어야 마땅할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속에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하네. 친한 친구와 대화 하면서 정작 마음은 딴생각으로 가득하다면 친구에게 못 할 짓 아닌가. 하나님 앞에 내 놓는 우리의 소원이 모두 회개해야 할 죄인 지도 모르네. 하지만 그 사실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 역시 그것을 하나님께 내놓는 것이네.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나침을 조절할 수 있도록 도우실 걸세.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를 떨쳐 내려고 노력할수록 그것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주의를 절망적으로 흩어 놓지. 누군가가 한 말도 있지 않나. "듣지 않으려고 애쓰는 소음만큼 크게 들리는 소리도 없다". 균형 잡힌 마음 상태는 기도로 구해야 할 축복 중 하나이지 기도할 때 입어야 하는 멋진 의상이 아니라네. 그리고 작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큰 시련이 닥칠 때 도움이 될 습관이나 방책을 익히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께 유치한 것들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큰 것도 구하지 못할 걸 세. 지나치게 고상 해서는 안 되네. 때로 우리가 작은 일들로 기도 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위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체면 때문일 듯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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